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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tory

오늘날 혁명적 행동은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Revolutionary Action Means Today/ Sheldon Wolin)

by Life's Searcher 2021.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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셸던 월린(Sheldon Wolin, 1922~2015)은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이다. 

그의 대표 저서로는 <Politics and Vision>, <Democracy Incorporated: Managed Democracy and the Specter of Inverted Totalitarianism> 등이 있다. 

이 두 대표작 모두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는데, 후자는 <이것을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Sheldon Wolin. 출처: https://www.commondreams.org/views/2015/11/02/sheldon-wolin-and-inverted-totalitarianism

셸던 월린 사후 2016년 <Fugitive Democracy>라는 제목으로 그가 그동안 저술한 주요한 글을 모은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는 "오늘날 혁명적 행동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제목을 가진 글이 있다.

이 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이 글은 1982년에 씌여진 것으로 파악된다. 

이 글을 이 블로그에 두 번에 걸쳐 소개하고자 한다.

 

이 글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한다.

정치체제가 민주주의의 형식적 특징을 보유하고 있으나, 노골적으로 억압적이지 않게 반민주적 경향을 보일 때, 민주적 시민이 혁명적 행동을 취하는 것은 타당한가?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초래하는 유사민주적 대체물이 확립되었는가?

민주적 시민이라는 생각은 본래부터 부분적으로 잘못되었는가?

오늘날처럼 진보하고 복잡한 사회적 상황에서 혁명의 가능성에 대해 토론하는 것이 이치에 타당한가?

어떤 조건에서 오늘날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이치에 맞을까?

그리고, 민주적 시민에 의한 혁명적 행동은 무엇일까?

 

그는 당시 미국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민주적 시민'이라는 주제에 대한 침묵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러한 침묵은 미국 공화국 초기부터 만들어지고 있는 위기를 보여주는 증상이라고 한다.

권리장전 운동부터 시작하여 수정헌법 13,, 14, 15, 17 그리고 19조가 채택되는 역사를 통해 보면, 어느 특징적 패턴이 나타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권리의 확대가 곧 민주주의의 진전으로 여겨졌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권리라는 이상이 시민적 활동의 자리를 빼앗고, 시민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이 우세해졌다.

자유주의에서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생물학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시민이 투표할 권리, 말할 권리, 종교의 권리, 재산에 대한 권리 등을 주장할 수 있기에 시민권은 민주적이라고 본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유주의적 시민 문화는 권리에 대하여 어떠한 내용도 제공해주지 않았다. 

법을 위반하거나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유롭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그들의 권리에 대한 이해인 것이다. 

여기에 맹점이 있다. 예컨대 KKK처럼 반민주적 목적을 위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어떻게 시민권의 민주적 개념과 양립할 수 있는가?

권리 행사에 있어서 내용과 지침을 제공해줄 수 있는 시민적 헌신과 공동 행동이라는 비전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 바로 자유주의가 지닌 역사적 실패하고 할 수 있다.

본래적 자유주의 기획의 본성에 비추어 보면 그러한 실패는 불가피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자유주의 기획은 바로 정부의 권력을 제한함으로써 권리를 보호하려는 것이었고, 미국 헌법에 명문화했다.

미국 헌법에 첫 열 가지 수정조항이 삽입되었을 때, 시민라는 개념의 윤곽이 나타났다.

이때 시민은 집합적 행위의 참여자라기보다 주로 권리의 보유자로 이해되었다.

첫 권리 장전에 나타난 몇몇 권리에 대해 살펴보면, 시민이 무엇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보다 정부가 무엇을 하는 게 금지되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의회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어떠한 법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 누구도 적법 절차에 의하지 않고는 생명, 자유, 재산을 박탈당하지 않는다.)

셸던 월린의 사후 출간된 <Fugitive Democracy and Other Essays>. 출처: https://press.princeton.edu/books/hardcover/9780691133645/fugitive-democracy

 

민주적 시민권에 대한 그 당시 침묵은 분열의 징조라고 볼 수 있다.

권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과 그것에 기반하고 있는 시민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 사이의 분열 말이다.

20세기에 정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행은 권리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을 급속하게 좀먹어들어갔다.

자유주의에서는 각기 자기 이해를 추구하는 여러 그룹이 벌이는 활동으로 정치를 바라보기에 정치란 본질적으로 권리에 위협을 가한다고 본다.

그렇기에 이때 과제는 정치의 영향을 조절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다.

나아가 정치에 대한 자유주의적 개념이 자유주의적 권리 개념과 불화하는 두 가지 지점이 더 있다.

첫째, 이해집단 정치에서는 정부가 권리의 불편부당한 보호자로 남기를 바라는 유권자가 없을 것이기에 정부가 권리의 보호자로서 기능할 거라는 예상은 무너지게 된다. 대신 정부는 주요 사안에 대해 충돌하는 권리 간의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해(집단) 정치는 권리 보호와 통합적 행동 수용에 우호적인 시민문화의 발전을 가로막는다.

이해(집단) 정치에서 정치적 주체는 시민이 아니라 개인이다. 개인은 이해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본인이 속한 집단의 지기 이익을 지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이 개인의 의무인 것이다. 반면에 시민은 여러 차이가 고려되어야 하고, 의사 결정에 반영되어야 하는 조건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주체이다. 그렇기에 시민은 배타적이 아니라 통합적이고 포괄적으로 사고하고, 공통성의 관점을 보유해야 한다.

 

이처럼 권리의 일관적 보호자로서의 국가 전통과, 정치적 행동을 촉진하는 시민문화 모두를 발전시키는 데 무능한 자유주의자들은 결국 권리의 상태에 급진적 변화를 초래하였다.

권리 장전이 정립된 이후 시기에 권리란 불편하고 고정된 것이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권리는 불확실해지고 정치화하였다. 오늘날 사회는 권리가 보조금, 세금처럼 주고받기식 정치의 한 부분이라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러한 권리가 지닌 가치의 변화는 "경제적 권리"라는 시스템의 최근 동향에서 생생하게 엿볼 수 있다.

뉴딜(New Deal)과 함께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권리란 형식적일 뿐이고, 일자리, 사회보장, 실업급여 등등 경제적 권리가 본질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제적 권리가 사람들의 역량을 강화하는 건 사실이지만, 이러한 주장은 경제적 권리가 지닌 특성을 간과한다.

정치적 권리와 달리 경제적 권리는 '한정된 자원'에 의존한다는 사실 말이다.

경제 상황이 좋을 때는 모르겠으나 불황 시키에는 한정된 자원을 둘러싸고 서로 다른 집단 간 균열이 발생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런 상황에서 이해집단 정치는 더 강화하고 공유된 가치와 공통 운명에 대한 관심은 나이브한 것으로 치부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월린이 바라본 현대 정치 내지 민주주의가 직면한 위기이다. 또 다른 위기 내지 정치적 조건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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