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라는 이름을 한 번쯤은 접해보았을 것이다.
한국은 여전히 반공주의의 영향력 아래 있기 때문인지, 한국어로 된 그에 관한 자료를 접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에 그를 생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 어떤 혁명가나 사회운동가들보다 나는 이상하게 로자 룩셈부르크에게 커다란 매력을 느낀다.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첫째, 그의 소수자로서의 정체성이다. 그는 여성이자, 유대인이자, 외국인이었다. 그가 살던 시대에 세계 여러나라에서 여성에게는 참정권조차 보장되지 않았다. 또한 반(反) 유대주의 정서가 만연해 있었다. 나아가 그는 그가 태어난 곳인 폴란드를 떠나 독일에서 주로 정치적 활동을 하였다. 비록 그는 독일 시민권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의 정적들은 그를 외국인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사회주의의 내로라하는 혁명가들과 논쟁을 하기도 하고, 감옥에도 자주 드나들며 열정적으로 활동한 그는 내가 지칠 때마다 큰 용기와 영감을 준다.
둘째, 그는 사회주의를 위해서 결코 타협하지 않고, 당대 지배적 견해와 어긋나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의 혁명적 사상과 행동은 그를 비극적 죽음으로 이끌었다. 반동적인 준군사조직 군인들에 의해 살해당한 뒤 운하에 버려진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는데, 젊은 나이에 맞이한 이러한 비극적 죽음은 나를 안타깝고 숙연하게 한다.
셋째, 그의 사상이다. 인간과 인간의 자발성 내지 가능성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그의 사상은 내게 커다란 감동을 주고, 오늘날 사회운동을 비판적으로 인식하게 해준다. 이 글에서는 그의 사상의 일면을 아주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심오하고 방대한 사상을 모두 요약하여 전달하는 건 지금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1871년 폴란드에서 태어났다. 당시 폴란드는 러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폴란드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스위스로 이주하여 취리히 대학에서 공부했다. 취리히 대학은 그 당시 여성에게도 동등한 교육을 제공하는 몇 안되는 고등교육기관 중 하나였다. 거기에서 로자는 법학과 정치경제학을 공부하여 1898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같은 해, 그는 위장 결혼을 통해 독일로 이주하여 독일 시민권을 취득한다. 그 후 당시 유럽 사회주의의 중심지였던 독일에서 그는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열정적으로 활동하였다.
독일에 정착한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에서 정치 활동을 전개한다. 당시 독일 사회민주당에는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Eduard Bernstein)을 위시한 자들이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적 견해를 피력하고 있었다. 베른슈타인은 고도로 산업이 발달한 나라에서는 혁명적 전복보다는 노동조합 활동이나 의회 정치를 통한 점진적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가 성취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자는 이러한 주장에 반발하여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라는 팜플렛을 썼다. 그는 의회라는 것은 부르주아의 도구에 다름 아니라며 혁명의 불가피성을 주장한 마르크스주의를 변호했다. 물론 그는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적 활동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사회 개혁을 위한 입법 활동만으로는 혁명을 성취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로자가 보기에 개량주의자들이 추구하는 건 같은 목표(사회주의)를 향한 더 평온하고 느린 길이 아니라, 그저 사회주의와는 다른 목표일 뿐인 것이다. 로자에게 중요한 건 사회 개혁을 위한 정치적, 입법적 활동이 결국 무엇을 향하고 있는가였다.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고, 이는 로자의 삶에서 커다란 비중을 지닌다. 러시아혁명기에 로자는 바르샤바로 갔고, 그곳에서 투쟁에 참여하여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경험으로부터 로자가 이끌어낸 결론은 대중파업과 같은 대중 행동이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대중파업과 같은 집단행동을 통해 민중은 자기 해방을 위한 경험과 계급의식을 배울 수 있고, 이러한 배움을 통해 사회의 혁명적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민중의 자발적 행동과 그를 통한 배움을 강조한 그에게서 민중에 대한 신뢰를 엿볼 수 있다. 로자의 이러한 견해는 레닌을 비롯한 사회주의 정당 지도자들의 반발을 샀다.
진정으로 혁명적인 노동자 운동이 범한 실수는 최고의 중앙 집행부의 완벽함보다 비할 수 없이 더 유익하고 가치 있다. -로자 룩셈부르크
바르샤뱌 교도소에서 풀려난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 학교에서 강의했다. 그 즈음 그는 <자본의 축적>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에서 그는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의 확장에 따른 결과로 보았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으로만 구성된 사회에서 판매의 확장과 그에 따른 이윤 창출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자본의 축적을 위해서는 자본주의 외부가 필요한데, 이는 그 당시 남반구(Global South)를 비롯한 저개발 국가들이었다. 그러한 저개발 국가들은 자본주의 사회를 위한 시장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값싼 노동력과 상품 생산의 원재료를 제공해준다. 더 많은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 축적을 위해 비자본주의 국가를 집어 삼킬수록, 비자본주의 국가들의 수는 줄어든다. 이로써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국가들 간에 이러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해지고, 결국 경제 위기, 전쟁과 같은 파국을 초래하게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다. 당시 로자가 속해 있던 독일 사회민주당은 이 세계전쟁에서 독일 정부를 지지한다. 하지만 로자는 즉각 이에 반발하였다. 로자에게 중요한 건 민족주의보다 세계 민중의 연대였던 것이다. 로자는 제1차 세계대전을 명백한 제국주의적 욕망에 기원한 것으로 이해했고, 민중들을 방패로 삼아 부르주아 계급을 강화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의 이러한 견해로 인해 그는 또 다시 감옥에 갇힌다. 그의 전쟁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는 1915년 <Junius Pamphlet>이라 불리는 팜플렛에 잘 담겨 있다. 그는 이 글을 Junius라는 필명으로 썼다. 이후 그는 사회민주당에서 반전을 주장하는 이들과 함께 스타르타쿠스라는 조직을 창설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의 생애 동안 러시아혁명을 두 차례 목격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1905년 혁명이고, 다른 하나는 1917년 2월과 10월에 발생한 혁명이다. 이 두 번째 혁명이 일어난 당시 로자는 감옥에 갇혀 있었고, 감옥에서 이를 지지하는 글 <러시아혁명에 대하여>를 썼다. 그러나 한편으로 로자는 이 글에서 볼셰비키(Bolshevik, 러시아 사회민주노동자당의 한 그룹) 독재를 우려하였다. 로자는 "보통 선거, 출판과 집회의 자유, 표현의 자유 없이는 삶의 활력은 모든 공적 기관에서 시들게 될 뿐이고 관료제만이 활개치게 된다."고 썼다. '위로부터' 만들어진 모든 조건은 소수의 독재와 공포에 의한 지배로 귀결될 뿐이라는 점을 로자는 심히 우려하고 있었다. 로자는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자유를 구분하였는데, 정치적 자유란 표현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 투표권 등 오늘날 법에 의해 보장 받는 기본적인 자유를 의미하는 한편, 사회적 자유는 착취와 모든 형태의 의존으로부터 탈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볼셰비키는 이러한 사회적 자유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로자와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로자가 꿈꾼 사회주의라는 건 이 두 가지 자유의 결합에 다름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쓴 <러시아혁명에 대하여>에는 자유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유명한 구절이 들어 있다.
정부의 지지자, 특정 정당의 당원만을 위한 자유는 (그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자유가 아니다. 자유란 항상 다르게 생각하는 자들의 자유이다. 이는 '정의'에 관한 광신 때문이 아니라, 정치적 자유에서 기운을 북돋고, 건전하고, 정제하는 모든 요소는 바로 이것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소수의 특권이 될 때 그것의 효용은 사라진다.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룩셈부르크는 인간이 행동하며, 그리고 경험에서 비롯된 지식을 쌓으며 배울 수 있고, 그러한 배움을 통해 해방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책이나 지도자 혹은 지식인을 통한 배움보다 인자발적이고 목적적인 행동을 통한 배움을 더 중시했다. 이러한 생각을 지닌 그였기에 당시 많은 정치 지도자들에게 그는 비판 받았다. 그의 이러한 태도, 민중에 대한 신뢰는 오늘날에도 절실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대중을 지도하려는 '지식인'들이 판치는 시대, 자신이 지도자가 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정치인들이 활개치는 시대, 대의를 위해서라면 그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 '민주주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시대에 그의 사상은 큰 울림을 준다. 내게 로자는 목표에서뿐 아니라 그 목표를 향해 가는 과정에서도 민중의 편에 섰던 사람이다. 몇 안 되는 그와 같은 사람이 이른 나이에 비극적 죽음을 맞이한 건 매우 슬픈 일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우리에게는 그의 사상이 남아 있다.
그의 사상뿐 아니라 그의 삶을 통해서도 우리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바로 인간이 되는 것의 의미 말이다. 로자는 지인에게 보내는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인간이 되는 것은 필요하다면 삶 전체를 '운명의 저울'에 기쁘게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모든 화창한 날과 모든 아름다운 구름에 기뻐할 줄 아는 것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는 세상의 부정의와 공포를 깊이 체감하였지만, 세상의 아름다움도 외면하지 않았다. 이러한 그의 삶은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성찰하게 한다.
<참고자료>
https://www.counterpunch.org/2017/07/21/the-revolutionary-imagination-rosa-for-our-times/
https://www.versobooks.com/blogs/5015-lessons-from-the-life-of-rosa-luxemburg
https://rosaluxemburg.org/en/positions/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Rosa-Luxemburg
Rosa Luxemburgs Stiftung, Short Biography of Rosa Luxembu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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