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한국 드라마 <D.P.>가 한창 화제를 끌더니, 뒤이어 바로 새로운 드라마 <오징어게임>이 세계인의 관심을 끌고 있다.
작년 넷플릭스 드라마 <스위트 홈>을 보고 많이 실망해서 이제 드라마 시리즈는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추석 연휴를 맞아 가족끼리 집에서 <오징어게임>을 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시간 보내기용으로 함께 봤다.
별 기대 없이 봤는데도, 아니 별 기대 없이 봤기 때문인지, 드라마 속 이야기 전개가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특히 빚, 가난, 도박 등 현실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내 관심을 끌었다.
이 드라마가 단순히 흥미를 자아내고,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영화인 것 같지만은 않았다.
그래서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도 와이프와 함께 이 드라마를 보았다.
그렇게 에피소드 9개를 며칠 만에 정주행했다.
이하에서는 드라마 <오징어게임>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는 한국 사회의 단면 몇 가지에 대해 간단히 기술해보고자 한다.
첫째, 가난한 자, 즉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에게는 삶에서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거의 없다.
오징어게임 속으로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 자들은 모두 사회에서 빚지거나 살아갈 희망이 없는 자들이었다.
첫 번째 게임인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충격을 받은 참여자들은 게임에서 나가기를 원하고, 투표 끝에 결국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사회에서도 희망이 보이지 않게 된 참여자들은 다시 '자발적으로' 게임에 참여하게 된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게임이 목숨을 건 도박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신 이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사회에서 여태 그래왔듯이 패배자, 약자, 주변인이 되어 살아가거나 서바이벌 게임에 참여하기.
그들은 전자보다 후자에 희망을 걸었다.
사실 전자나 후자나 그들에게는 달갑지 않은 선택지다. 그러나 그들은 사회에서 벼랑 끝으로 내몰렸기에 그들 앞에는 이 두 가지 선택지가 있고, 그들에게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남은 것이다.
둘째, '부자-서민-동물'이라는 위계가 존재한다.
기훈은 돈을 벌기 위해 경마장에서 도박을 한다. 그런 기훈은 게임 참여자로서 부자들(VIP)이 베팅하는 도박 게임의 '경주마'가 된다.
부자는 가난한 자를 대상으로 베팅하고, 가난한 자는 경주마(동물)를 대상으로 베팅하며 일말의 희망과 함께 게임을 즐긴다.
이 세 존재 간에 서열 혹은 위계가 있다면, 부자가 제일 위, 서민이 그 아래, 동물이 가장 아래인 것이다.
셋째, 현대 사회에서는 가난한 자나 부유한 자나 모두 불행하다.
가난한 자는 가난하기 때문에 불행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은 비참한 삶을 의미한다. 남들 밑에서 기어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도 온전히 지키기 어렵다.
그런데 부유한 자도 불행하다. <오징어게임> 마지막 에피소드에 나오듯이, 일남은 그토록 많은 부를 소유했지만,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어렸을 때 즐긴 게임을 다시 즐기기 위해 오징어게임에 참여한다.
<오징어게임> 속 일남의 모습은, 특히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는 무척 행복하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나는 부자가 아니라서 왜 부자들이 행복하지 못 한지 이유를 알 수 없다.
다만 어느 연구에 의하면, 일정 수준 이상의 부를 소유하게 되면, 그 이후부터는 부가 행복에 미치는 영향이 크지 않다고 한다. 어느 정도까지는 부를 소유할수록 더 행복할 수 있지만, 그 기준을 넘어'선 수준의 부를 소유하는 순간, 부와 행복이 정비례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를 <오징어게임>에서는 일남이 증명해주었다.
넷째, 현대 사회에서의 경쟁은 생존 경쟁이다.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게임은 서바이벌 게임이다. 게임에서 탈락하거나 지면 죽는다.
구슬치기 게임이나 줄다리기 게임처럼 때로는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하는 게임도 있다.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라고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하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누구 하나 경쟁에서 자유로운 이는 없는 것 같다.
현대 사회에서의 경쟁은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다. 그게 돈일 수도, 대학 입학일 수도, 지위일 수도 있다.
즉 내가 그 자원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남이 도태되어야 한다. 제로섬 게임인 것이다.
몇 년 전, 한창 은행에서 돈을 만드는 메커니즘에 관심이 많을 때 관련 도서를 여럿 읽었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돈을 만든다. 채무자는 은행에 빚을 갚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사회에서 도는 돈은 한정돼 있기에 문제가 된다.
의자앉기 게임에서 게임 참여자 수보다 의자가 늘 1개 부족하듯이, 사회에 유통되는 돈은 빚보다 늘 부족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게임, 이 채무관계에서 도태될 수밖에 없다.
내가 은행 빚을 갚기 위해서 누군가는 파산해야 하는 것이다.
구슬치기 게임에서 게임 참가자들은 둘 중 하나만 살아남는 2인 1조 게임을 하면서, 살아남기 위해, 즉 상대방을 죽이기 위해 온갖 책략을 다 쓴다.
이 게임 참여자들과 현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이는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다섯째, 이 극심한 생존 경쟁의 승자는 과연 행복할까?
문제는 이 생존 경쟁에서 이기더라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다. <오징어게임>에서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두 인물이 바로 프론트맨(Front man)과 성기훈이다.
성기훈은 게임의 전 과정을 거쳐 최종 승자가 된다. 그러나 마지막 게임인 오징어 게임에서 승리까지 마지막 한 발자국이 남은 순간, 그는 게임 포기 선언을 한다.
최종 승자가 되어 상금 456억 원을 챙길 수 있게 되었는데, 그는 왜 승리를 코 앞에 두고 포기 선언을 했을까?
우여곡절 끝에 그가 최종 승리자로서 상금과 함께 사회로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그 상금을 한 푼도 사용하지 않는다.
게임 도중 죽어간 수많은 참여자에 대한 죄책감 때문일까? 아니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일까?
게임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그에게 남은 건, 이미 숨을 거둔 어머니였다.
그는 최종 승리자가 되었음에도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내게 매력적인 캐릭터인 프론트맨은, 몇 년 전 이 게임에서 최종 승리자였다.
그도 분명 어마어마한 상금을 차지했을텐데, 왜 바깥 세상으로 나가지 않고 이 게임을 주관하게 되었을까?
사실 그는 이 드라마 속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인물들 중 한 명이다.
그의 속마음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드라마 속 그의 언행을 통해 볼 때, 그는 로봇처럼 원칙에 따라 사는 인물인 것 같다.
그는 게임 진행요원이 게임 규칙을 지키지 않았기에 죽인다.
그리고 그가 한쪽 콩팥까지 내주면 그토록 사랑하던 동생도, 그의 제안을 거부하자 죽인다.
그는 변했다. 예전, 즉 게임에 참여하기 전 그에게는 양심, 정, 그리고 사고 따위가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현재 그에게는 이런 게 없다. 아니, 이런 게 중요하지 않다. 오직 '원칙'과 '규칙'이 중요할 뿐이다.
이는 그가 게임에 참여하는 동안 얻게 된 생존 전략일 수도 있고, 사회에 환멸을 느껴 사회로부터 도피한 그가 찾은 안식처일 수도 있다.
그에게는 감정을 표현하는 창구인 얼굴을 드러내는 것보다, 늘 똑같은 가면으로 그 얼굴을 가리는 게 더 편한 것 같다.
지금 그는 적어도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현대 사회에서 극심한 생존 경쟁의 승리자들은 과연 행복할까?
나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승리자들은 분명 자신이 이룬 것들을 지키려고, 잃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불안과 두려움, 그리고 어쩌면 죄책감을 느끼며 살 것이다. 아니면 프론트맨처럼 예전과는 다른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
여섯째, 극심한 생존 경쟁 속에서 서로에 대해 신뢰를 갖기 어렵다. 하지만 연대의 가능성은 존재한다.
생존 경쟁 속에서는 서로를 신뢰할 수 없다. 내 동료가 나를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는가?
이 게임은 생존이 걸린 문제이니 말이다.
게임 속 참가자 중 한 명인 양아치도 자기 그룹의 구성원들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대는 요원하다.
하지만, 구슬치기 게임에서 자기희생을 보여준 캐릭터 지영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자신은 살아남아 사회에 돌아가더라도 할 것이 없다며, 죽음을 선택하고, 새벽을 살린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자기희생을 통한 연대 혹은 타인에 대한 공감은 드라마에서나 가능할까?
나는 충분히 현실에서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사회적 조건이 최악일지라도 나는 공감 능력을 바탕으로 한 연대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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