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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tory

[셸던 월린] 오늘날 혁명적 행동이란 무엇인가? Part 2. (What Revolutionary Action Means Today)

by Life's Searcher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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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에 걸쳐 셸던 월린이 쓴 글 <오늘날 혁명적 행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다루고 있다.

 

지난 글에서는 위 글의 전반부를 다루었다. 

이 글 전반부에서 월린은 '민주적 시민'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미국 전역에 걸쳐 존재하는 침묵을 지적하며, 시민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시민권에 대한 자유주의적 관점에서는 '권리'라는 개념에 대하여 어떤 의미 있는 내용도 제공해줄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실패는 자유주의의 본질상 불가피하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자유주의의 모순-정치와 권리에 대한 상충하는 자유주의적 관점-드러내며 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암시했다.

자신 혹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에 충실한 '개인'과, 공통성, 통합적 사고, 협력, 개방성 등을 특징으로 하는 '시민'을 대비시키며 시민성을 장려하는 문화가 필요하다는 게 월린이 이 글에서 일관적으로 주장하는 바인 것 같다.

이번 글에서는 <오늘날 혁명적 행동이란 무엇인가?>의 후반부를 간단히 다루고자 한다.

월린이 보기에 현대 정치는 정치적 수동성을 또 다른 특징으로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정치적 수동성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바로 탈정치화이다. 

그러면서 주로 가난하고, 소수인종에 속하며 배제된 자들이 탈정치화 경향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을 분절하는 특별한 복지 프로그램의 '희생양'이 된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누군가의 삶의 일거수일투족이 관료에 의해 면밀히 조사, 관리되고, 그 삶이 복지 프로그램에 따라 재조정된다면, 그 사람은 정치적 존재로서 완전한 불구가 되는 것이다. 왜? 그는 '자기'라고 하는 전체성(totality)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박탈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정치경제라는 시스템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탈정치화 경향이 극단으로 나타난다. 왜냐면 '지표'가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이때 지표란 가격, 임금, 인플레이션, 실업률, 구매력 지수 등 누군가가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설명해준다. 그러기에 지표는 누군가가 영향을 미치거나 조절할 수 없는 어떤 '힘'으로 기능하고, 이 지표에서 나쁜 성적을 받는 이들을, 혹은 지표가 나타내는 사회적 조건에 취약한 이들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최근 정치경제 시스템의 괄목할 만한 성공은 기업정치가 정치의 형태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오늘날 정치경제는 정치적 항목 내지 기대를 경제적인 것으로 바꾸어버린다. 우리가 시민으로서 참여하지 않는다면, 소비자로서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원할 때마다 욕구 충족 수단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리면서 말이다. 그리고 마치 마법처럼 상품 진열장에 새로운 상품이 갑자기 출시되면, 우리 욕구 하나하나에 경제가 일일이 반응한다고 느끼게 된다. 이러한 반응성은 우리의 선출직 대표자나 비선출직 공무원들에게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월린은 사회에 만연한 비관주의(pessimism)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억압된 혁명적 충동을 나타내는 징표로 바라본다. 오로지 혁명적 변화만이 오늘날 미국 사회에 내포된 안 좋은 결과를 피할 수 있게 해주지만, 그러한 혁명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사실에 대한 합리적 확신이 비관주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이제 월린은 이 글의 핵심 낱말인 '혁명'에 대해 논한다. 그는 칼 마르크스보다 존 로크의 혁명론이 오늘날 우리에게 더 많은 시사점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본다. 오늘날 관건은 집합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형식과 실천을 재발명하는 것이지, 어느 사회 계급이 권력을 잡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배자가 사람들의 삶, 자유 그리고 재산 등에 대해 절대적 권력을 행사한다면,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제도를 설립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존 로크는 주장한다. 곧 로크가 말하는 혁명에 대한 권리는 새로운 형식을 창조할 권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혁명권은 소수 엘리트나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people), 즉 다수(the majority)에게 있다고 로크는 주장한다. 

이러한 로크의 혁명론에 비추어 보면, 시민권이란 단지 권리를 주장하는 데 있지 않고, 권력을 생성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나아가 시민권이란 권력을 나누고, 협동하는 능력에 관한 것이다.

 

월린은 현대 사회에 '거부주의(rejectionism)'가 팽배해 있다고 본다. 투표를 하지 않는 것, 상명하복하는 것, 전문가 집단이 부패한 사회에 봉사할 마음을 갖지 못해서 돈과 지위에만 집착하는 것 등등 여러 모습으로 거부주의는 나타나고 있다. 거부주의의 이면에는 기성 정치가 국가 개혁이라는 과업을 수행하지 않을 것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이러한 기성 구조는 시민들이 새로운 삶의 형식을 만드는 데 헌신할 때에야 균열이 생길 수 있다. 그러려면 시민은 기성 정치 구조, 국가 패러다임, 자유주의적 시민권 개념 따위를 거부해야 한다.

특정한 장소에 존재하고, 가족, 친구, 교회, 이웃, 직장 등등 한정된 관계에서 자양물을 얻는 존재가 바로 월린이 생각하는 정치적 존재(political being)이다. 이러한 관계로부터 정치적 존재는 상징적, 물질적, 심리적 권력을 얻고, 다른 이들과 함께 행동할 수 있게 된다. 민주적 관점에서 보면, 권력은 단지 발생되는 동력이 아니고, 경험, 분별력, 지혜, 심지어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우울감(나는 이 단어에 밑줄을 그었다) 등이다.

이렇게 접근하면, 오늘날 실천과제는 거부주의에 구성적 형태를 제공하고, 이를 정치화할 수 있는 현존 사회운동을 배양하고 육성하는 것이다. 특히 월린은 풀뿌리운동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풀뿌리운동은 국가-시장 구조 바깥에서 성장하고, 억압적인 힘 앞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번창하고 있다는 것이 주요 특징이다. 월린은 풀뿌리운동이 '지역주의'가 갖는 한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며, 독자들을 경계하게 한다. 그리고 그 당시 막 등장하기 시작한 반핵운동, 제국주의적 외교 정책 반대 운동, 인권 보호 운동 등을 희망의 조짐이라고 보며 글을 맺는다. 

 

두 차례에 걸쳐 월린의 글 <오늘날 혁명적 행동이란 무엇인가?>를 정리해보았다.

추후 이 글에 대한 내 생각을 간단하게나마 정리해서 글을 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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