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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Story

YH무역과 여성 노동자들

by Life's Searcher 2022.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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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70년대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통해 가능했다. 특히 1960년대 정부는 가발, 신발, 섬유 등 경공업을 집중 지원하여 경제성장을 추구했다. 이러한 경제구조 속에서 장용호는 1966년 가발 제조회사 YH무역을 설립했다. 설립 당시 자본금은 100만 원, 직원은 10명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수출 경기 호황과 정부의 수출 지원 정책으로 YH무역은 창립 4년 만에 종업원 4천 여명, 수출 순위 15위 기업으로 성장했고, 사장 장용호는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사실 장용호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긴밀한 인맥을 보유하고 있었다. 충북 옥천 출신인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부인 육영수 여사와 동향에다가 당시 실세인 김형욱 중앙정보부장과 부동산을 공동 소유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경공업 경제는 주로 여성 노동자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기업들은 여성 노동자의 임금이 싸기에 이들을 고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챙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YH무역 노동자들도 대부분 국민학교(오늘날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농촌에서 상경한 십대, 이십대 여성 노동자들이었다. 아무튼 YH무역은 급속하게 성장하였으나 노동자들의 처지는 나아지지 않았다. YH무역은 도급제를 활용하여 노동자들의 작업 물품에 단가를 매기고, 일정 시간 동안 개인이 작업한 성과에 따라 보상을 해주었다. 일한 만큼 돈을 벌 수 있다는 명분으로 초과 노동을 유도하고 경쟁을 조장한 것이다. 하지만 작업 물품 단가가 낮았고, 일감이 없을 때는 빈털터리가 된다는 문제가 있었다. 당시 건조반에서 일했던 한 노동자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잘 모르니까 시키는대로 할 수밖에요. 게다가 일거리가 없어서 공치는 날은 한 푼도 못 벌고 밥값만 빚지고 퇴근하는 수도 있었어요. 74년인가 75년인가 공치는 날이 한참 많을 때는 글쎄, 한 달 봉급이 1,575원이었어요. 그런데 그 당시 기숙사 밥값은 3천원이었거든요. 결국 마이너스 봉급을 받은 셈인데 그런 때는 시골에 가서 빚을 얻어와 생활을 했지요.
- 안재성, YH사건 - 여공들, 민주주의의 봄을 부르다, 오픈아카이브

 

 

YH무역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12시간, 14시간, 심지어 24시간 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월급은 당시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고 그런 월급도 제때 받지 못하기도 했다. 열악한 노동조건에 항의라도 하면 강제로 부서이동을 당했다. 이에 대한 항의로 건조반 여성 노동자 200명은 작업을 거부했는데, 건조반 조장들이 경찰에 연행되면서 짧은 작업 거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YH무역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어용노조가 득세하던 시절에 아래로부터 노동조합을 만드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YH무역은 노동조합 결성을 위해 활동한 직원들을 해고하거나 강제 출장을 보냈다. 하지만 이러한 회사의 탄압도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노동자들의 열망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회사의 일상적 감시와 통제 아래 노동자들은 비밀리에 교육을 진행하며 조합원을 모집했다. 

 

노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은 기숙사 몇 호실로 모이라는 쪽지를 돌린 뒤, 방에 불을 다 꺼놓고 이불을 덮은 채로 사측에 발각되지 않기 위해 신발을 모두 기숙사 방 안으로 넣고서 교육이 진행됐다.
- 나랑, 전태일은 알지만 김경숙은 모르는 당신에게, 일다

 

이렇게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노동자 900여 명이 노동조합 가입원서를 작성하였고, 결국 1975년 5월 24일 전국섬유노조 YH지부가 결성되었다. 이렇게 결성된 '민주노조'는 그 이름에 걸맞게 조합원들의 참여와 교육을 강조했다. YH노조는 모든 조합원의 의견을 중시하기 위해 3~4명씩 소그룹을 구성하고, 소그룹별로 토론을 진행하고 토론 내용을 기록하여 모두가 볼 수 있게 게시하였다. 이렇게 탄탄한 기반을 다진 노동조합은 50% 상여금 지급을 성취하기도 했다.

 

YH무역 노조 최순영 지부장이 76년 5월 정기대의원대회를 진행하는 모습. 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595191.html

 

국내 최대 가발업체로 성장한 YH무역은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다. 장용호 사장이 본인의 동서 진동희에게 YH무역을 맡기고 본인은 미국으로 이주하여 여러가지 사업을 개시했다. 장용호는 YH무역에서 생산한 가발을 싼 값에 외상 구매한 뒤 돈을 갚지 않았다. 대신 그는 미국에서 '용인터내셔널'이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백화점, 호텔 등을 지었다. 장용호의 동서 진동희는 YH무역의 사장이 되어 노동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상여금 10억 원을 빼돌리고 해운회사를 설립했다. 이처럼 경영진의 잇따른 횡령과 무리한 사업 확장과 함께 수출 감소로 인해 가발산업이 쇠퇴하자 YH무역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경영진은 노동자를 해고하고,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하면서 이 위기에 대응하고자 했다. 1970년 4천 명에 달했던 노동자들은 1976년에 1,8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1979년 3월, YH무역은 폐업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노동자들은 이에 반대하여 농성을 시작했다. 아울러 노동자들은 은행과 노동청 등을 찾아다니며 회사 정상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YH무역이 그해 8월 일방적으로 폐업을 공고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노동자들. 출처: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81491.html

 

무기한 농성을 결의한 노동자들은 공장, 기숙사, 신민당사를 차례로 옮겨다니며 농성을 이어갔다. 박정희 유신체제의 경직성과 폭력 아래에서 이 노동자들이 최후로 기댈 수 있는 곳은 야당인 신민당뿐이었던 것이다. 1년 전 시행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은 여당인 공화당보다 득표율에서 1.1% 앞섰다. 시민들의 지지에 힘입어 신민당은 박정희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투쟁을 더욱 강력히 전개할 기반을 갖춘 상황이었다. 당시 신민당 김영삼 총재는 YH무역 노동자들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 신민당사에서 최후의 농성을 시작한 노동자들은 슬픔에 울기도 하고, 울분에 차서 격양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행동지침을 마련하여 단결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다. 신민당 농성 당시 YH무역 노동자들이 든 플래카드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쓰여 있었다.

 

"정상화 아니면 죽음이다"

"우리를 나가라면 어디로 나가란 말이냐"

"배고파 못 살겠다. 먹을 것을 달라"

 

신민당이 YH무역 노동자 농성의 배후라고 생각한 박정희는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고자 했다. 8월 11일 새벽 2시, 여성 노동자 187명이 농성 중인 신민당사에 경찰 1,200여 명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신민당 국회의원과 당원, 기자 등을 무차별 구타하였고, 경찰 2명이 1명을 체포한다는 소위 '101작전'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강제로 연행했다. 101작전은 20여 분만에 끝났고, 신민당사에는 여성 노동자들의 뒤엉킨 신발들과 머리에 두르던 머리띠들만이 남아 당시의 처참함을 말해주었다.

 

경찰에 의해 강제 연행된 뒤 농성현장에 남겨진 신발들과 머리띠들. 출처: http://weekly.khan.co.kr/khnm.html?www&mode=view&art_id=202102051452361&dept=115

 

신민당사 뒷편 지하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서 한 여성 노동자가 쓰러져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머지 않아 숨지고 말았다. 그 노동자는 YH무역 노동조합의 조직부 차장 김경숙이었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경찰은 김경숙의 사망 원인을 3번이나 번복한 끝에 '자살'이라고 최종 발표했다. 한 사립병원의 복도에서 영정 사진도, 조문객도 없이 그의 장례는 경찰관 입회 하에 그의 가족들만 분향한 뒤 3분 안에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이 사건 이후 박정희는 김영삼의 언론 인터뷰 발언을 문제 삼아 그를 국회의원에서 제명해버렸다. 이는 '부마민주항쟁'을 촉발하였고, 그해 10월 26일 박정희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로써 철통 같던 유신체제는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29년이 지난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당시 부검 기록을 분석하여 김경숙의 죽음은 자살이 아니라 경찰의 진압과정에서 사망한 것으로 확인해주었다. 손등에 쇠파이프로 가격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상처와 모서리 진 물체로 머리 뒷 부분을 가격당한 치명적인 상처에 주목한 것이다.

 

신민당사 농성 현장. 출처: https://www.ildaro.com/8532

 

YH무역에서 일 할 당시 노동자들은 '보름달빵계'라는 것을 만들었다. 밤 10시까지 야근을 할 경우 노동자들은 야식으로 보름달빵을 받았다. 하지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들어 노동자들은 이 빵을 마음 놓고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보름달빵을 여러개 모아 한 번에 고향에 부쳐주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계를 만든 것이다. 그들 역시 배고픔에 허덕이는 처지였지만, 그들에게는 뒷바라지 해야 할 가족들이 있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일찌감치 공장으로 간 노동자들에게는 배움에 대한 깊은 갈망이 있었다. YH 노동조합이 주도하여 개설한 녹지중학은 노동자들이 야간에나마 그러한 갈증을 풀 수 있게 해주었다.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감과 배움에 대한 열망을 지녔던 그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장에서 평소에 '시다 몇 번, 미싱사 몇 번' 혹은 '공순이'로 불렸다. 당시 한국 경제성장을 떠받치는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에서 정권에 의해 '산업역군'으로 호명되기도 했다. 착취와 불의에 저항하자 그들은 이내 '빨갱이년'으로 불리게 되었다.

 

<참고자료>

오픈아카이브 사료 컬렉션: YH사건

오늘의 아카이브: 빵계, 오픈아카이브

나랑, 전태일은 알지만 김경숙은 모르는 당신에게, 일다

정희상, 독재의 종언 예고한 '여공들의 투쟁', 시사인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연구소 엮음, 한국민주화운동사2, 돌베개

안재성, YH사건 - 여공들, 민주주의의 봄을 부르다, 오픈아카이브

정영훈, 세상이 다 알았던 죽음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죽음 - 김경숙 일기, 오픈아카이브

KBS <역사저널 그날> "YH 여공, 유신을 무너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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